에르메스나 샤넬 같은 럭셔리 브랜드에서 재고란 눈뜨고 차마 볼 수 없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얼마나 용납할 수 없냐면, 재고가 남으면 매년 태워버리고 땅에 묻어버렸다. 아울렛과 같은 2차 3차 유통망에서 싸게 판매할 바에는 다 없애버리는 편이 낫다는 것이 (브랜드 전략을 위해서나, 세무적인 관점에서나..) 그들의 입장이었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해도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MZ세대는 환경 문제에 민감하고 젠더, 윤리, 사회적 책임, 공정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명품 브랜드도 ‘지속가능성’을 내세우며 지구와 사람을 생각하는 활동들을 통해 MZ세대의 마음을 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런 변화에서 ‘소각’이라니, 과거의 관행이 얼마나 많은 자원 낭비이며, 환경오염을 일으키는지 사회적 관심과 눈초리가 뜨겁다. 심지어, 많은 명품하우스의 본고장인 프랑스에서는 20년도부터 아예 의류나 잡화의 재고를 매립하거나 소각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다. 불과 몇년 새에 어떤 변화들이 있었을까.
근본적인 문제, 과잉생산에 대한 고찰
환경파괴의 원인으로 석유산업 바로 다음을 잇는 것이 패션산업이라고 한다. 가장 큰 문제는 과잉생산. 만약 10벌이 생산되면 이 중 3벌은 팔리지 못하고 매립지나 소각장으로 간다고 한다. 또, 많은 브랜드에서 지나치게 유행을 선도하며 ‘패스트패션’ 이라는 분위기를 조장하고 소비를 부추기는 것도 문제다. 하지만 이제 이러한 관행에 경종을 울리고 변화를 위해 의미있는 고민을 하고 있는 몇개의 브랜드가 있다.
2017 베트멍의 캠페인 2017년 영국 해롯 백화점의 쇼윈도에 재미있는 광경이 펼쳐졌다. 베트멍이라 적힌 쇼윈도 안에는 백화점 직원들이 기부한 의류로 시작해 백화점 고객들의 기부가 이어졌고, 낡은 옷들이 천정에 닿을 만큼이나 쌓여갔다. 모두 더이상은 입지 않는, 버려질 옷 들이었다. 이날 안입는 옷을 가져오면 플라스틱을 재활용해 만든 팔찌를 나누어줬다고 한다. 패션브랜드와 소비자들에게 과잉생산, 과잉소비에 대해 경고하는 캠페인이었다.
“굶주림으로 가득 찬 세상에 음식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다음 세대를 생각하지 않고, 점점 더 많은 것을 원하기만 하기 때문에 우리의 지구가 병들고 있습니다”
Vetements의 CEO Guram Gvasalia
“의식 없는 옷은 의미가 없다. 옷은 시대를 반영하고, 나는 이를 표현할 뿐이다” 환경과 동물을 생각하는 디자이너, 스텔라 매카트니. 과잉생산과 과소비로 인한 환경 파괴에 반대하고자 스코틀랜드의 쓰레기 매립지에서 촬영된 2017 F/W 브랜드 캠페인 영상을 공유하고 싶다. 이 캠페인을 통해 과잉생산과 과소비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떤 결과를 만들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나 그녀의 행보에 대해서는 정말 할 말이 많은데 자세한 것은 다음을 기약하자. (최근 많은 명품 브랜드에서 환경보호에 동참하고자 시작하는 활동들은 모두 이미 그녀가 20년 전부터 해오고 있는 일들이다.)
“힘들고, 우울하고, 비통한 촬영이었죠. ‘패션 광고를 촬영하는 게 아니라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위한 촬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패스트 패션은 매년 수백만 벌의 옷을 태워 없애요. 끔찍한 일이죠.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어요.”
스텔라 매카트니
명품 하우스들의 똑똑한 재고 처리 방법
이제 과거의 쉬쉬하던 관행이 사라지고 모두가 지속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브랜드의 희소성을 지키면서 재고를 없애지 않고 똑똑하게 활용하는 것이 명품 브랜드들이 풀어야 할 숙제인 셈이다.
버버리는 구직활동을 하는 여성에게 의류를 기부하고 있다. 2013년부터 영국의 자선 단체인 Smart Works 와 협력 하여 도움이 필요한 여성의 재취업을 돕기 위해 자선 단체에서 제공한다. 특히 버버리는 지난 2018년에는 버버리가 전년도에 재고 500억원어치를 소각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엄청나게 욕을 먹었었다. 그 당시 여파로 구직여성을 지원하는 파트너십도 더욱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 버버리는 2019년, 세계 최대 규모의 중고명품 마켓플레이스인 TheRealReal과 공식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버버리의 재고를 위탁하기로 한다.
GUCCI가 약속하는 지구와 사람을 위한 긍정적인 변화. 구찌는 20년에 더리얼리얼과 파트너십를 맺고 수익금으로 원 트리 플랜티드(One Tree Planted)를 통해 제품이 팔릴 때마다 나무 1그루씩을 심고 있다. 이 파트너십을 기념해 Sustainable(순환)을 그네를 이용해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파트너십 덕분인지, 21년도 더리얼리얼이 공개한 한해 가장 많이 판매된 브랜드 1위는 구찌였다. 구찌는 이러한 활동 외에도 “사람과 지구를 위한 긍정적인 변화” 라는 슬로건을 내건 Gucci Equilibrium를 통해 환경과 사람을 위해 하는 일련의 모든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디자이너들에게 루이비통의 원단을 판매하는 노나소스. 루이비통이 속한 LVMH그룹이 운영하는 ‘노나소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 LVMH의 사내 창업 프로그램으로 2020년에 시작된 “노나소스”는 명품 그룹 LVMH의 루이비통 뿐만 아니라 셀린느, 디올, 지방시 등의 럭셔리 브랜드들의 재고 원단을 파는 BtoB 리세일 플랫폼이다.
노나는 로마 신화의 3대 파르카 여신 중 한 명으로 노나는 생명의 실을 뽑고, 데시마는 엮고, 모르타는 그것을 자른다고 한다. 여기서 실은 인간의 삶의 시작부터 죽음까지를 상징한다. 개인적으로 노나소스라는 이름에 담긴 의미가 흥미롭다. 또한 LVMH는 전문 의류 기부를 모아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취약 계층에게 제공하는 크라바트 솔리데르(Cravate Solidaire)와 파트너십을 맺고 있다.
알렉산더 맥퀸 “젊은 창작자가 큰 어려움을 겪는 시기에 우리의 자원을 나누고 새로운 기회를 주는 활동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영국 전역의 대학교, 전문대학, 지역 교육기관 등에 패션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해 원단을 제공한다.
참고로 알렉산더 맥퀸은 새빌로의 테일러점에서 일하는 것으로 패션을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패션을 전문적으로 배울만큼 유복하지 않았던 점을 생각하면, 아직 피어나기 전인 창작가들을 지원하는 이러한 활동이 정말 의미있지 않나 싶다.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슬로우 패션’
패션을 사랑하고, 명품 브랜드의 스토리와 명품만이 갖는 가치를 동경하는 사람으로써, 옷장에 잠자고 있는 옷과 신발, 가방에 대해 생각해보게된다. 나 또한 과거에는 충동적으로 구매하고는 사용하지 않거나 멀쩡한 의류를 버리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껴본 경험이 꽤나 많았다.
나 같은 경우, 재미있게도 좋아하는 럭셔리 브랜드가 생기고 유행보다는 제품의 질이나 희소성을 따지기 시작 했고 자연스럽게 구매하는 제품의 가격대가 높아졌고 반 강제적으로 슬로우 패션에 입문 하지 않았나 싶다. 특히나 나처럼 럭셔리 패션을 사랑한다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고가의 제품을 구매하면서 좀 더 신중해지고, 나에게 잘어울리며,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을 보는 안목이 생겼다. 동시에 자연스럽게 하지않게 된 것들이 있다.
첫째, 편하게 사용할 것들 구매하기. 목이 늘어난 티셔츠, 어디서 공짜로 받은 에코백, 몇년은 거뜬한 무난한 운동화나 슬리퍼 등등 굳이 사지 않아도 집에 이미 쌓여 있다는 걸 알게 됬다.
두번째, 유행에 휩쓸려 쇼핑하기. 유행은 금세 짜게 식는다.. 번외편으로 로고플레이 또한 웬만하면 피하게 된다.
마지막 세번째, 세일 코너 기웃거리기. 어릴 땐 ‘Sale’ 네 글자에 혈액순환이 빨라지고는 했다. 하지만 이제는 먼저 가지고 싶은 강한 소유욕이 끓는 특정 제품이 있는 게 아니라면 세일이라고 해서 쇼핑은 물론 구경조차 하지 않는다.
모두 환경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된 것들은 아니지만 나처럼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한 것들부터 실천할 수 있다. 덜 구매하고, 신중히 고르고, 오랫동안 아껴 사용하면 된다. 또한 세컨핸드 상품이나 업사이클링 상품을 소비하며 지속가능성, 선순환에 동참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함께 시작해봐요. 슬로우 패션.